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임스 롱스트리트 (문단 편집) === 전후 === 전쟁 이후 롱스트리트는 루이지애나 주 뉴올리언스로 이사하였고 그레이트 사우저 & 웨스턴 손해보험회사의 사장이 된다. 허나 결국 이 사업은 실패하였고 이후 여러 사업에도 시도를 해보지만 결국 대부분이 실패하고 만다. 롱스트리트는 옛 친구 그랜트의 도움으로 [[앤드루 존슨]] 대통령에게 사면을 요청했지만, 존슨은 옛 남부연합 수뇌부 중 사면해줄 수 없는 사람 세 명으로 데이비스 대통령과 리, 그리고 롱스트리트를 꼽았을 정도로 롱스트리트를 경계했다. 1868년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 급진파]]의 도움으로 롱스트리트 등 옛 남군 장교들은 사면받고 정치 등에 참여할 수 있었다. 1868년 대통령 선거에서 롱스트리트는 그랜트를 지지했고, 그랜트는 취임 직후 롱스트리트를 연봉 6,000달러를 받는 뉴올리언스 세관 조사관(surveyor of customs) 자리에 임명해 주었다. 전후 그는 [[공화당(미국)|공화당]] 지지자이자 남부 재건(reconstruction)의 옹호자가 되었는데, 사관학교 시절 이래 그의 오랜 친구였던 그랜트가 연방군 총사령관을 거쳐 대통령이 되며 승승장구한 것도 한몫했을 것으로 보인다. 남부의 공화당 옹호자를 가리키는 멸칭인 스캘러와그(scalawag)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며, 남군의 옛 동료들로부터 변절자로 비난받기도 했다. 특히 로버트 리가 남군의 명예의 상징으로 추앙받게 되면서 그 반대급부로 남부에서는 더욱 평가절하되었다. 심지어 1873년에서는 뉴올리언스 경찰과 흑인 민병대를 이끌고 인종차별주의 백인 반군과 대처하기도 했다. 이후의 공화당 정권에서 롱스트리트는 여러 직책에 지원했고, 주 [[오스만 제국]] 대사, 철도위원 등 여러 공직을 거치게 된다. 노년의 롱스트리트는 다른 퇴역 장군들처럼 회고록을 남기고 1904년 2월 1일 조지아 주 개인스빌에서 사망하였다. [[분류:1821년 출생]][[분류:1904년 사망]][[분류:에지필드 카운티 출신 인물]][[분류:네덜란드계 미국인]][[분류:미국의 군인]][[분류:남북전쟁/군인]][[분류:미연합국/인물]][[분류:미국 공화당 소속]]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